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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이야기 선반

내가 구원을 받았는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구원의 확신, 증거)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10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할 수 있다면, 그것이 구원의 증거가 될 수 있는가?

 

내가 청소년 때도 그러했지만, 현재 청소년, 청년들 중에도 비슷한 고민을 하는 이들이 많다.

 

수련회 때는 눈물을 흘리며, 찬양하고, 회개기도하지만

정작 집으로 돌아와 삶을 살다보면, 3일을 가지 못하고 다시 죄를 탐닉하는 내 모습.

그러한 내 모습에 스스로 실망하고, 자책하며

'내가 그 때 느꼈던 것들은 다 무엇이지? 거짓인가?'

생각하게 되고, 좌절했었던 경험. 기억.

 

과연 구원의 확신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라는 질문에 "영접기도 했습니다." 라는 대답이 충분한가?

 

 

마태복음 7장에서는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했다.

그럼, 무엇이 열매인가? 어떤 열매가 맺어져야 내가 구원 받았음이 증명 되는가?

 

야고보서 2장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했다.

어떤 행함이 있어야 하는가? 어떤 행위가 살아 있는 믿음이요, 구원의 증거가 되는가?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구원이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행위의 대가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점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너무나 많이 들은 이야기이지만,

의외로 우리는 눈에 드러나는 행위로 구원에 대한 보장을 확인받고 싶어한다.

 

'새벽기도 올출', '찬양팀이나 성가대나 다른 봉사', '구역장이나 셀장, 목장 등의 리더로 헌신' 등등.

눈에 보여지는 행위로 우리가 "얻었으나 실제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구원"에 대하여

보장을 받고 싶어 한다. 마치 보험처럼.

 

 

우리는 눈에 보여져야 안심하고, 인정하려 한다.

 

그러나, 위에 드러난 행위는 증거가 될 수 없기도 하다.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말한 마태복음 7장에서는 곧바로 이어진 내용이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가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행위는 필요 없는가? 결코 아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은 결코 거짓됨이 없는 진리의 말씀이다.

성령님께서 야고보 사도에게 감동을 주어, 기록하게 하신 말씀이다.

 

행위는, 행함은, 열매로서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드러나게 한다.

 

다만,

모든 열매가 좋은 열매는 아니다. 아름다운 열매는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다. 우리에게는 영안(靈眼)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열매(행위=결과)를 보고 그 나무(존재=원인)를 파악하게 된다.

 

 

우리는 '죄를 행한 것'을 보고 '죄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행한다'고 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신다. - 히브리서 4장

애초에 우리 인간에 마음에 죄악만 있음을 아신다. - 창세기 6장

 

예수님이 우리 수준으로 낮춰 말씀해 주신 것이지, 하나님은 본질, 존재, 원인을 먼저 아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은, 행위=결과 자체를 원하시지 않으셨다.

그 행위=결과 가 나오게 된 마음=존재=원인을 더 귀하게 여기셨다.

 

그래서 말라기에서는 "성전의 문을 닫아라!"라고 한탄하셨다.

"성전에 와서 제물도 드리고, 제사도 드리지만, 마음이 없어 마당만 밟고 가는 행위"라고 한탄하셨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확신을 어떻게 가질 수 있게 되는가?

 

다른 것이 아니다.

'마음'이다.

 

추상적으로 여겨지는 "구원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는,

추상적으로 보이지만 '마음'이다.

 

생각해보라.

마음 없이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수도 있다.

사탄도 광명의 천사의 옷을 입는데, 인간이 자기의 입으로 말하는 것 정도.

얼마든지 거짓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주님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정말로 주님을 위해 살아보고 싶습니다."
"나 비록, 죄에서 완전히 자유하지는 않지만, 주님의 거룩을 닮아가고 싶습니다."

 

이 '마음'이 생긴 것.

그 '마음'이 정말로 '소망'이 된 것.

 

이것말고 다른 어떤 증거가 있을 수 있을까?

 

 

꽃다발 자체가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없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이가 나에게 준 꽃다발이어야 그것이 사랑의 표현이 된다.

 

에스겔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한 마음을 주겠다"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닌가?

너희가 입으로는 주여주여 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다고 한탄하신 하나님께서 중히 여기는 마음이.

증거가 될 수 있지 않은가?

 

 

주변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자. 그들의 마음 가운데

"어떻게 하면 주님을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죄를 짓고, 죄를 좋아하는데... 이런 내가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만들어 가주실까?"

"비록 죄인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참자유.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예수님의 사랑을 좀 더 느껴보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교회에 억지로 나와서 앉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조금이라도 진실한 거룩이 무엇인지 씨름하는 이들이 있을까?

 

하나님의 사랑을 원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아파하는 마음.

예수님의 구원의 기쁨이, 요한복음 8장 32절의 '참 자유'가 무엇인지 정말로 알고 싶어 사모하는 마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구원의 시작점에 발을 딛고 있다는 것일 수 있지 않은가?

 

더러운 의자라도, 의자는 의자다.

등받이가 부서진 의자라도 의자는 의자다.

비록 더럽고, 부서져 있어도, 의자는 의자이다.

 

지금 당장, 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어도.

그런 내 모습을 하나님 앞에 울며 도와달라고 말하며

다시 한 번 죄와 싸우려 발버둥치는 그 마음이

구원을 맛 본 자의 모습일 수 있지 않을까?

 

 

수련회가 끝나고 혹시 괴로워 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생각해보라.

 

주님을 위해 살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진실했는지

그 마음을 지금도 소망하는지.

 

만약 그렇다면.

 

지금은 아직 보이지 않아도.

그 사람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어 있다.

 

크든 작든

많든 적든

 

반드시.

 

 

ps.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에베소서 5:10

그래서 사람들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기도, 헌신을 한다.

새벽기도 올출. 그 자체가 구원의 증거가 되지는 않지만

'주님을 기쁘게'해드리고 싶어 새벽기도 올출 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무엇이라 하실까?

 

결코 싫어하시지 않으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