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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이야기 선반

성경의 순서도 하나님의 은혜

창출레민신 수삿룻 삼상하 왕상하 대상하....

 

어렸을 때, 교회 수련회에서 성경약어표를 외워야 밥을 줬었다.

그 때에는 '왜 이걸 굳이 외워야 하나? 그냥 어디 찾으라고하면 어디 찾아서 보면 되는거 아닌가?'하면서

뚱한 표정과 불만으로만 있었다.

막상 외우고나서는 뭔가 해냈다는 뿌듯함(?)에 기분이 좋았다.(사람이 이렇게 단순하다...;;;)

그 때 밥을 먹기 위해 외웠던 성경약어표가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저, 성경을 좀 더 빨리 찾는 용도(?)로만 여겼던 성경약어표.

조금 더 시간이 흘러, 성경의 순서를 살펴보니.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다.

 

성경안에서, 성경끼리 서로 해석되어지고 연결되어져 풍성하고 분명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유대인들의 성경과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의 순서는 좀 다르다.

칠십인역의 순서를 따르고 있는 우리는, 유대인들의 구약의 순서와 다른 구약의 순서를 가지고 있다.

 

무엇이 '맞는 것'이냐라고 따진다면, 맞는 것은 없다.

하지만, 그 순서에 따른 의미가 그저 은혜고 감사다.

 

대표적으로 유대인들의 구약의 순서와 다른 부분을 뽑자면,

유대성경에서는 잠언 다음에 룻기가 나온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서는 사사기 다음에 룻기가 나온다.

역사의 흐름으로 매우 자연스러운 순서다.

 

하지만, 잠언 다음에 나오는 룻기도 매우 자연스럽다.

왜냐면, 잠엄의 맨 마지막 장인 31장에서는 '현숙한 여인'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 잠언 31:10

 

잠엄의 마지막이 현숙한 여인인데, 그 뒤에 바로 룻기가 이어진다.

그렇다면, 잠언에서 말하는 현숙한 여인의 대표적인 모습이 누구이겠는가?

바로 룻이다.

 

"그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 잠언 31:13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보살피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밭에 나아가 이삭을 주워온다.

부지런한 룻의 모습은 잠언 31장에 등장하는 현숙한 여인의 모습이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 잠언 31:30

룻은 이방 여인이지만,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기 원합니다."(룻기 1:16)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원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로 룻은 다윗왕의 계보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여러 사람들의 입에 칭찬받을 자로 오르내리게 된다.

 

유대인의 성경대로 읽으면, 마치 유치원 선생님이 말하는 것 같다.

"자아~ 어린이 여러분~ 여러분은 현숙한 사람이 되고 싶나요? 그런 사람이 대표적으로 누가 있을까요? 짜잔~

네에~ 바로, 룻이라는 여인이에요."

 

성경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가게 하면서, 롤모델을 제시한다.

유대인의 성경의 순서도 감사하고 배울 것이 있다.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고, 말씀이 하나님 되심을 믿는다면, 구약도 신약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읽는 성경의 순서도 은혜다.

특히나 신약성경의 순서가 더 감사히 와 닿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공관복음이 먼저 등장한다.

그리고 요한복음이 등장한다.

 

누가복음 다음에 바로 사도행전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그 중간에 요한복음이 들어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하는 누가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말하는 사도행전 사이에서

요한복음은 분명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 - 요한복음 14:6

예수님 외에는 하나님께 이를 수 없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진리와 생명 되심을 온전히 선포한다.

그 예수님이 성령님에 대해 말씀해주시는 내용도 요한복음이다.

그 성령님의 임재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그린 것이 사도행전이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사이에 요한복음이 있다는 것이, 단순히 복음서끼리 묶인 것이 아니라 은혜다.

 

그렇게 사도행전이 마무리되자 바로 등장하는 로마서.

너무나 직접적으로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설명하고 드러내는 이 서신서가 사도행전 뒤에 등장한다.

마치 "우리가 전한 예수에 관한 내용은 이것이다!"라고 설명해주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뒤에 고린도서를 등장시킴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더 부각된다.

 

사도행전 2장의 성령 사건 이후, 스데반의 순교 사건으로 흩어지는 교회의 모습.

완전한 공동체일줄 알았던 교회의 약점이 사도행전 초반에 드러난 것처럼.

그리스도를 나타낸 로마서 다음에 교회의 연약함이 다양하게 드러난 고린도서가 등장함으로

우리의 대단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이 은혜임을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갈라디아서를 배치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관하여 오해와 다툼이 없게 한다.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스도파... 여러 분파로 나뉘기도 했던 고린도서 다음에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갈라디아서의 등장은 우리의 구원과 삶의 방향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다듬어 준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로마서, 갈라디아서) 개인과 교회의 모든 문제(고린도서)를 감싸는 듯 하다.

 

그리고 난 다음에 구원의 은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아름다움이 에베소서를 통해 드러난다.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서를 통해 교회 공동체의 다양한 아름다움과 통일된 방향성을 가르쳐준다.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 빌레몬서는

그렇게 다양하고 풍성한 교회를 우리가 성도로서 어떻게 섬겨야 할지를 보여준다.

말씀에 집중하고, 원수된 종을 용서하고... 

 

그렇게 해야 할 이유를 다시금 히브리서를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통해 우리에게 도전한다.

 

이 모든 믿음에 관한 신앙과 삶의 해석을 방만히 여기는 자가 나타나기에

교회의 수장된 야고보가 믿음의 증거가 되는 행함을 강조하여주며

 

교회의 기둥된 베드로가 다시오실 주님에 대한 소망을 불어넣으며

믿음과 행함의 일원화된 성도의 모습을 호소한다.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소망이 나타났기에 곧바로 계시록이 이어져도 이상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 사이에 요한의 3가지 편지와 유다서를 넣어주셨다.

주님의 마음과 사랑 그리고 거짓교사와 분별에 대한 강조를 하신 후에

 

마지막 계시록을 주셨다.

 

 

세월이 흘러, 말씀을 접하는 미디어는 달라질지 몰라도, 중요한 것은 읽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는 것이겠다.

하나하나, 따로 보아도 은혜의 말씀이지만

그 순서도 은혜다.

 

주님을 알게하고,

그 나라를 소망하게하며,

믿음으로 흔들리지 않고,

문제가 있더라도 예수님 안에 서 있기를 바라며

주님의 몸된 교회로,

풍성한 교회로,

왜 그렇게 자라나야 하는지,

단순한 머릿속 이해가 아닌 삶의 행위가 되어야 함을.

다시 오시는 주님에 대한 소망을 붙잡고,

그 주님의 사랑의 말씀을 분별하여,

마지막 때를 기다리며 주님 오시기를 소망하는...

 

하나님의 은혜고, 계획하심이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