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식을 할 때, 빵과 포도주를 마시면서 예수님을 기념한다.
왜 그럴까?
간단한 대답은, 예수님이 기념하라 하셨기 때문이다.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 누가복음 22:19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이어서 생각을 해야 한다.
무엇을 기념하라는 것인가?
예수님과 함께 했던 식사시간들? 예수님이 건넨 음식의 종류?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나를 기념하라"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실 때 예수님을 기념해야 한다.
예수님 자체를 기념해야 하지, 빵과 포도주를 기념해서는 안된다.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1. 빵과 포도주를 주님은 자신의 몸과 피라고 하였다.
맞다.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이요, 피라고 하신 것이 맞다.
하지만, 빵과 포도주 자체가 예수님일 수 없고, 그것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지 않는다.
카톨릭의 '화체설'(성찬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는 실제 예수님의 몸과 피. 때문에 함부로 만져서는 안되고, 사제들만 만질 수 있다. 그래서 카톨릭의 성찬에서는 사제들이 신도들의 입에 직접 넣어준다.)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다.
빵이 예수님의 몸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성경의 두 구절만 보아도 화체설에 대해 동의할 수 없게 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요한복음 1:14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 요한복음 6:51
이 두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는 단순한 사실은
1) 예수님의 육신은 말씀이다.
2)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식인에 대한 이야기가 당연히 아니다. 예수님의 '삶'이 '말씀'이시다.
말씀이 육신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인간의 몸으로 입고 이 땅에서 살아가신 삶.
말과 행동과 마음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이 '말씀'을 먹어야 영생이 있다. 예수님이 주신 살은, 빵이 아니라 말씀이시다.
포도주를 예수님이 자신의 피라고 하셨다. 하지만 이에 대하여 이 말씀을 생각해보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 레위기 17:11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다. 피가 생명이다.
단순하게 이 문장 그대로 받아들여도 이해가 된다. 사람의 몸의 70%가 피인데, 부족하면 죽는다.
피가 돌아 세포에 영양분을 주어야 근육이 살고, 신경이 살고, 생명이 있다.
단순하게 문장 그대로 받아들여도 '피=생명'이다.
예수님의 피를 마시라는 말은, 예수님의 생명을 얻으라는 뜻이지 않겠는가?
포도주 자체가 신성한 것도, 신성하게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생명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 요한복음 11:25
예수님이 생명이시다. 그분을 믿고 주님으로 모시며
말씀이 육신이신 분이시기에, 그 말씀을 따르는 삶의 순종.
우리가 성찬에서 기념(기억) 해야 하는 부분이지 않는가?
작은 카스텔라, 작은 포도주잔을 나누어주고(때로는 교회 예배당의 구조상, 앞으로 나가)
1~2분의 짧은 시간으로 지나가기에는
우리가 기념해야 할 주님의 몸과 피는.... 무겁고, 찔린다.... 그리고 너무... 죄송하고.... 정말로 감사하다.
2. 성찬의 음식은...
초대 교우들의 성찬은, 주님을 기억(기념)하는 일에 큰 역할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고, 사도들도 살아있지 않은가.
직접적인 그들의 이야기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전달이
빵과 포도주를 나누며 전달이 될 때 더욱 효과적으로 나타났음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그러한 초대 교회에서 성찬은 하나의 역할을 더 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하여 분명하게 정립되지 못하고 혼돈한 상황이기도 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었지만, 여전히 '유대교 안의 그리스도'로 여겨졌다.
이러한 생각이 깨진 것이 안디옥교회이다.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된 이들은,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모습을 보며,
자신들의 믿음과 구원의 범위, 방법을 올바르게 해야 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배려를 버리지 않았다.
디다케에 남아 있는 내용들 가운데는, 안식일과 3일째 기도시간을 피해 모임을 가졌던 기록들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들은 로마 시대를 살아가면서 삶의 노동의 시간 또한 져버리지 않았다.
"주님이 곧 오시니까, 다 필요 없다"는 식으로 살지 않고 노동의 시간을 가졌다.
(유두고가 바울의 설교를 듣다가 졸아 떨어진 것은, 유두고의 믿음 없음이 아니다. 만약 그가 정말로 게으르고 믿음도 없었다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바울의 메시지를 들으러 오는 노력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하나님이 그를 살려주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러, 저러한 이유로 저녁에,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시간에 성찬이 이루어지는데
그래서 성찬은, 예수님을 기념하는 의식임과 동시에
그 음식들(빵과 포도주)은 모두가 함께 먹는 공동식사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 사도행전 2:4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 고린도전서 10:16
(사도행전의 기록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끼리만 저녁식사 모임을 자주 가지며 교제 했다고만 보기 어렵다. 고린도전서 말씀은 문맥상,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에 대한 논의 가운데 나온 내용이나 사도행전 말씀과 연관지어 보면, 성찬이 예배의식 가운데 한 파트로만 국한되었다기 보다는 그리스도인들의 교제 가운데 주님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식사를 나누었음으로 볼 수도 있다.)
성찬의 사용된 음식이 남을 경우, 요즘에도 따로 땅에 묻거나 하는 일들이 있다.
틀린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빵과 포도주가 한 끼도 어려운 이들에게 돌아가도
잘못된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우리는 화체설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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