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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이야기 선반

보는 것과 믿는 것

 

 

"증거를 보고 믿는 것과 보지 않고 믿는 것. 둘 중 어떤 믿음이 '더 좋은' 믿음일까?"

 

이에 대해서 성경은 '당연히'

'보지 않고 믿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더 좋은' 믿음이라고 말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 요한복음 20:29

 

의심 많은 도마가(... 근데 사실 도마는 직접적인 의심은 한 번만 했는데... 의심 많은 이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난 못 자국과 창자국을 직접 만져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고 말하자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 번 생각해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 믿는 믿음. 좋은 믿음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눈에 보이는 가시적 물건과 표징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야곱이 벧엘에 돌을 세운 것과 여호수아가 요단강의 열두 돌을 가져다가 기념으로 쌓은 것 등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념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념하여 '보이게끔' 하는 일들이 많다.

이는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빵과 포도주를 나누면서 "나를 기념하라."라고 가시적으로 보여주신 성만찬에도 해당된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빵과 포도주로, 기념하라 하셨다.

 

물론, 초점 자체가 다르긴 하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 전에 "증거를 대라"라는 식의 반응과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행하신 일을 기억하여 기념하고자 "증거를 남기는 일"은 분명히 초점이 다르다.

전자는 분명 하나님에 대하여 공격적이고, 주권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반면,

후자는 하나님에 대하여 순종적이고, 하나님을 높이는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념하는 자'들은 직접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본 자'들이다.

그들의 후손은 자신들의 눈으로, 몸으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의 후손들은,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직접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념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사사기에서 믿음이 전수가 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직접적인 이유로는, 1)두려움과 2)안락함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한 것이 올무가 되지만

가나안 정복세대는 정복전쟁이라는 영적 전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였다.

하지만 가나안 정착세대인 사사기 세대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영적 전쟁이 없었다.

자신들의 눈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볼 기회를 만들지 못했고, 만들지 않았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 사사기 2:10

 

단순히 교육의 문제가 아니다. 지식전수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불순종하여, 가나안인을 진멸하지 않아 순수하지 못한 신앙이 되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게 된 것.

이것이 가나안 정착세대의 문제였다.

때문에 이들이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방법,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볼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일"이었다.

 

공의의 하나님으로서만 징벌하신 것이 아니다. 사랑의 하나님도 아픈 마음으로 징벌을 하셨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믿음의 대상이 눈에 보여지는 것, 눈으로 보고자 하는 것이 꼭 불신의 상징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흔히들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확인할 때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가?

"당신은 하나님을 만났습니까?"

 

만남 가운데, '보는 것'은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감각이 된다.

보지 않고도 느낄 수 있지만, 직접 눈 앞에 상대를 보면서 만나는 것은 가장 강력한 만남의 감각이다.

 

욥도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내용이 이렇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 욥기 42:5

 

공격적인 불신으로써 보여달라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일이다.

하지만, 정말로 하나님을 더 깊이 느끼고, 알기 원하여 주의 영광을 보기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었다.

모세도, 다윗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원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않는가?

사랑하면, 보고 싶은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이스라엘이 금송아지 사건으로 말미암아 진멸당하게 생겼을 때,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들을 위한 중보기도로 위기를 넘긴 적이 있다.

그리고 이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은총을 약속하시고, 그 순간 모세는 은총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 앞에 소원을 구한다.

바로,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 출애굽기 33:18

 

사랑하는 사람을 '보고 싶은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에서 '보고 싶어하는 마음'은 상대방을 행복하게 한다.

 

신약시대, 예수님의 부활승천 이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사실 구약의 믿음의 선배들 시대보다 훨씬 좋은 시대다.

구약의 시대에는 진실로 선택받은 몇 명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인도를 경험할 수 있었다면,

신약시대의 우리는, 모두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내주하심으로 하나님의 음성(기록된 말씀)을 듣고, 그분의 인도를 경험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은 "분명하고 실제적인 감각"으로 하나님을 느끼고 경험해야 하는 부분이다.

 

성경을 읽으나, 그 말씀이 부딪쳐오지 않는다면... 얼마나 안타까운일인가?

문학을, 자기 계발서를 읽으면서도 우리는 말한다. "책을 통해 작가와 만난다."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데,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들은, 성경을 읽기 전에 기도하고 읽으라고 하였다.

"이 말씀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믿어지게 해 주세요."

 

이 기도를 통하여 말씀을 '내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엇일까?

성경에 나타난 '약속'을, 하나님이 하신 '언약'을 나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야곱에게, 요셉에게, 모세에게, 여호수아에게, 사무엘에게, 다윗에게...

수많은 성경의 인물들에게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그 약속의 내용이 곧 나에게 향하신 약속의 내용이라 믿는 것. 믿어지게 되는 것.

그것이 곧, '내 말씀'이 되는 은혜를 입은 것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되는 시작이 된다.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은 한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결코, 자신을 위해서 일하신다. 절대로,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신다.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 스스로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 스스로의 이름으로 하신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며, 믿어지게 되는 은혜를 입으면... 정말로 하나님의 응답이, 그 약속들이 나의 눈앞에 펼쳐지게 되고, 보게 된다.

 

사사기 세대들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큰 일을 보지 못한 세대"이다.

누구를 위해? 이스라엘을 위해.

그런데 이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 곧 누구를 위함인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함이다.(출 32:12,13)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면(마 6:33),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의 눈에 보여주신다.

그것을 '본 자들'이 말하는 것이 '증언'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한 자들이 밖으로 나아가 '증인'이 된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

주권을 내가 가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게 되는 것.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것을 보는 것 또한 중요하다.

진실한 증인은, 위증을 하지 않는, 거짓 증인이 아닌 참된 증인은.

자신이 본 것을 말하는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