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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선반/출애굽기

출애굽기 3장(3:11-22) 2. 모세의 반응과 하나님의 대답(1)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다 들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대표가 되어 바로에게 가서 히브리사람들을 풀어주기를 전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모세의 반응은 어떠한가?

 

 

자격을 묻는 모세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곧바로 순종하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먼저 자격을 묻는다.

 격(格)의 뜻은 "주위 환경이나 형편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분수나 품위"라고 나온다.

 자격(格)의 뜻은 "일정한 신분이나 지위를 가지거나 일정한 일을 하는데 필요한 조건이나 능력"이다.

 

 즉, 모세가 지금 하나님께 받은 명령에 대해 스스로가 검증하는 것이다.

 "모세가 하나님께 이르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 출애굽기 3:11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다. 이 세상 어느 누가 한 민족의 대표가 되는 일에 대해 초청을 받았는데, 스스로가 그럴만한 격이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심히 교만한 자다.

 겸손한 자가 아니라도 부담이 되는 자리이다. 어떤 조직, 공동체의 대표라는 것은 책임을 지는 자리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어떤 일이나 상황에 대처하여 손실이나 피해를 무효화하거나 최소화 하는 것을 우리는 책임을 다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책임을 질 수 있는 여부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능력에서 나온다. 능력이 없다면 책임을 지지 못한다.

 또한, 책임 질 수 있는 능력이 있어도, 마음이 없다면 책임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책임에 감(感)자를 붙여 책임감이라는 말이 따로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음이 없다면 능력이 있어도, 책임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많은 능력, 큰 능력은 책임을 동반한다. 이를 수행하는 자는 존경을, 이를 져버리는 자는 이기적이라는 평을 피할 수 없다. 인간의 능력은 결코 홀로 독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허면, 모세를 생각해보자. 출애굽기 3장 1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 출애굽기 3:1

 

 이집트의 왕자였던 모세가, 지금 광야로 도망쳐와서 장인의 양 떼를 치고 있다. 자신의 양 떼도 아니다.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장인의 양 떼를 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때 모세의 나이가 몇인지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출애굽기 2장에서 도망친 다음 상당한 시간이 지났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모세는 자신의 양 떼가 없다. 자신의 소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저 사람은 능력이 있다."고 말을 하는 기준이 무엇일까? 여러가지가 있다. 사람들에게 인망이 두터운 것, 언변이 수려한 것, 남들은 하지 않는 도전을 하는 것 등등. 하지만 다양한 능력 가운데 공통적인 속성이 있다. 그것은 '소유'다. '결과'다.

 아무리 도전을 많이 해도 돈을 벌지 못하거나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 받지 못하면, 우리는 그 사람을 이상론자라고 생각하거나 빛 좋은 개살구라고 생각한다. 어떤 소유의 결과를 내지 못하면, 우리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모세는 지금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장인의 양 떼를 치고 있다. 모세가 데릴사위라서 장인의 재물이 결국에는 모세의 것이 되겠는가? 성경은 어디에도 그러한 기술을 하지 않았고, 설령 그럴듯한 추론이라 하더라도, 출애굽기 2장 16절을 보면, 이드로에게 딸이 일곱이 있다. 데릴 사위라면 다른 여섯이 더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양 떼는 온전히 모세의 것이 아니다.

 

 또한, 애굽의 왕자와 장인의 양 떼를 치는 양치기. 다른 이들은 어떨런지 몰라도, 모세 스스로는 자신의 능력이 왕자일 때와 지금이 너무나 비교가 되지 않겠는가? 애굽에 왕자로 있을 때는 천하의 대부분이 모세 스스로의 것처럼 여겨졌다. 권위가 있고, 힘이 있었다. 그러니,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학대할 때 그를 쳐 죽일 생각까지 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유리는 낮은 곳에서 우연찮게 떨어져도 깨지지 않는다. 하지만,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설령 철로 만들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깨진다. 애굽의 왕자의 자리에서 도망자로 떨어진 모세의 마음은 이미 깨져있다. 단순히 마음이 깨진 것만이 아니라 현실적이다. 애굽의 왕자로서도 못하던 일을, 양치기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스스로의 능력을 알고 있는 모세가, 한 민족의 대표성을 지닌 책임자의 역할을 한 번에 수락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은 책임을 질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리고... 이미 마음도 무너졌다.

 

 

임마누엘을 말씀하시는 하나님

 모세의 두려움, 걱정을 하나님은 아신다. 히브리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 듣고, 아시는 하나님이 모세의 두려움과 걱정을 모를 리 없다. 그래서 모세에게 하나님이 말씀 하신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수 많은 말, 현상보다 하나님은 '함께 있는 것'을 약속하신다...근본적인 해결책이자,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이게 상당히 사람을 당황스럽게 한다. 함께 하겠다. 이 한마디를 가장 먼저 꺼내신다. 한가지 재밌는(?) 것은, 출애굽기 3장에서는 하나님 출애굽의 구체적인 설명을 따로 해주시지만, 모세 이후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이들에게는 설명도 안하고 임마누엘과 할 일만 말씀하신다. 대표적으로 여호수아, 기드온, 에스겔, 예레미야 등이 있다.

 

 사람을 위로하거나 격려할 때 필요한 것이 있다. 공감이다. 그들이 느끼는 슬픔과 고통, 공포의 근원을 이해하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그 근원을 놓고 위로와 격려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치 모세의 두려움, 걱정의 근원(능력의 부재)을 모르시는 것처럼, 아니, 무시하시는 것처럼 대답을 하신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실상, 모세는 현재와 같은 이성적인 과학의 시대 사람이 아닌, 신들의 시대 사람이다. 이 때 당시의 사람들에게 과학은 곧 신들에 대한 능력의 상관관계이다. 나일강의 신과 태양신, 죽음의 신 등등을 통해 삶의 모습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이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자신 개인의 능력 뿐만 아니라 자신이 섬기는 신들의 능력" 또한 중요한 요소이다.

 히브리 사람들은 40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였다. 만약, 히브리의 민족신이 강했다면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겠는가? 애굽의 신들보다 히브리 민족신이 강력했다면, 400년 간 잠잠할 수 있었을까?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심지어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 애굽의 역사와 신화를 공부했을 것이 당연하다. 그들의 역사 가운데 일어난 전쟁의 승리, 자연재해의 극복을 신들의 은총을 통해서 극복하였다고 배워온 모세라면, 애굽 자체의 군사력과 국력 뿐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신들의 권능까지 두려워 할만한 요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모세의 두려움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임마누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세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까?

 

 당연히 될 수 있다.

 애굽의 역사에서 숨길 수 없는 사실 또한 요셉이다. 비록, 요셉을 모르는 왕들이 애굽을 지배하고 있으나, 히브리 사람들이 요셉을 잊었을리 없다. 뒤 이어 곧바로 묻는 모세의 질문과 하나님의 대답을 보아도 그렇다.

 

 "그들이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 출애굽기 3:13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 출애굽기 3:14-15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라고만 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밝히셨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칭호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가?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전능성을 나타내지 않는가? 아브라함 한 명만 보아도, 이미 그가 애굽에서 자신의 아내 사라를 바로에게 빼앗긴 가운데 하나님이 그녀를 바로에게서 돌려준 적이 있지 않은가? 태양신의 아들이라는 바로에게서 말이다.

 

 왜 이제까지 400년간 침묵을 하셨는지 모른다. 모세 뿐만 아니라 당대 히브리 사람들 중에 그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믿음의 사람이 있었다면, 성경이 기록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당대 사람들은 하나님이 400년간 침묵을 하신 이유를 모른다.

 하지만, 이유를 모르는 침묵이, 역시 마찬가지로 특별한 계기가 된 이유는 모르지만 깨졌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함께 하시겠다고 한다. 전능한 하나님이시라고 전해 들은 우리의 민족신이, 이미 애굽의 신들의 권능을 한차례 누르셨던(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사건) 그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 민족을 건져내시겠다고, 함께 하겠다고 하신다.

 이것은 분명히 위로와 격려가 되는 일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나오며, 부르심을 확인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임마누엘이다. 기적과 현상은 그 다음이다.

 앞서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우리의 재능이나 상황의 결과에 좌지우지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를 부르시고, 그 가운데 주신 사명의 내용은 하나님의 언약에 있다고 하였다.

 

 보통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마도 이런 것이지 않을까?

 "ㅇㅇ야, 너는 앞으로 ㅁㅁㅁ의 일을 하여라. 그것을 위해서 이런이런 능력을 준비하고 키워야 한다. 위급한 순간이 올 때는 저러저러 해야 한다. 늘 깨어 기도하고 나를 의지하렴.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아주 구체적이고, 안심이 되는 내용이다. 나아갈 목표(ㅁㅁㅁ)도 제시해주고, 그 목표를 이룰 방법(이런이런 능력을 키울 것)도 제시해준다. 어려움이 올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려주시고, 함께 하시겠다고도 해주신다. 최고다. 완벽하다.

 하지만 이런식의 부르심은 '거의' 없다. '거의'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하나님의 전능과 무한하신 은혜로 인해 우리가 알지못하는 곳에서, 70억이 넘는 사람 가운데 있을 수도 있으나, 말 그대로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조금은 억울한 마음도 든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알려주시면 안되는 것인가? 왠지 모세에게는 이렇게 해주신 것 같다. 3장 후반부를 보아도 그렇다.

  1) 17절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것이다."

  2) 18절 "애굽 왕에게 가서 광야에서 사흘길 즘 가 제사 드리겠다고 해라"

  3) 19-20절 "애굽을 치기 전에는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4) 21-22절 "빈 손으로 애굽을 나가지 않을 것이니, 구해라 그리하면 다 얻을 것이다."

 

 출애굽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자세한 편이다. 어떤 상황이 될지, 어떤 반응이 올지, 거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등등.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세하게 설명해주시고 하라고 하는 것 같다. 이렇게 설명해주시면, 나라도 헷갈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물론 현실은 아니겠지만...)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묘사하신 현상들. 기적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부르심은 약속에서 나온다. 그리고, 기적도, 현상도 하나님의 약속에서 나온다.

 모세에게 설명한 모습들은 이미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약속의 내용들이다.

  1) 창세기 15장 13절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사백 년 동안 괴롭힐 것이다."

  2) 창세기 15장 14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한다."

  3) 창세기 15장 14절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온다."

 

 무슨 뜻인가? 기적도, 현상도. 하나님의 약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상황과 환경이 어려우면 기적이 일어나는가? 아니다. 상황과 환경이 어려워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이 있으면 기적이 일어난다. 현상적 기적 자체가 하나님의 부르심의 증거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으나, 그것이 당장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닌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한 학생이 있다. 그 아이가 가족을 전도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알콜 중독이고 술을 마시면 어머니를 때린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게서 가정을 지키려고, 두 아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려고, 폭력 가운데서도 가정을 깨지 않고 직장에 다니시며 돈을 버신다. 첫째 아들이 중학생 때 하나님을 경험하고 가족을 위해 기도한다. 동생은 점점 삐둘어져서 학교에서 싸움만 하고 다니고 미래에 대한 생각은 접었고, 아버지는 바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 가운데, 이 첫째 아들에게 하나님께서 가족 구원에 대한 강한 마음과 간절함을 주셨다. 눈물로 구하는 애타는 마음 주셨다. 어떻게 되겠는가? 기적처럼 다음날 가족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을까?

 8년. 8년이 걸렸다. 이 아이가 하나님께 마음을 받고 기도하며 가정에서 여러 일들을 감당한지 8년이 지나 아버지께서 교회에 다니시게 되었다. 동생도 이름을 들으면 명문이라고 하는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기적이다. 하지만, 8년 동안 이 아이의 마음이 어땠겠는가? 분명히 강력하게 가족 구원에 대한 타는 마음을 주셨는데, 1달이 지나고, 2달, 3달, 6개월, 1년, 2년, 3년, 5년이 지나는 동안. 어떤 마음이 들었겠는가?

 

 '이 마음이 가짜인가?'

 '이 마음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니었던가?'

 '하나님은 분명 우리 가족 구원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왜 이루어지지 않지?'

 '어떻게 해야하지? 어떤 방법을 써야 하지?'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온갖 의문과 두려움과 답답함... 그리고 괴로움 가운데 있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기도하는 자리에서 이 아이는 울었다.

"하나님... 언제까지입니까?...알려주세요. 제가 지금 잘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때는 누구도 모른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내용, 나에게 주어진 사명이 이루어지는 때는 언제인가? 그 기다림 가운데 우리가 기다릴 수 있는 힘은 임마누엘이다.

 

 당장 기적의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거나 가짜이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은 직업이나 직종, 재능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가운데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고.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매 순간 하나님의 임마누엘 가운데 있어야 하며

 내게 일어나는 현상들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해석하고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스스로의 자격이 의문이 들 것이다.

 이 마음이 맞는 마음일까?

 나에게는 능력이 없는데, 왜 이런 메시지가 설교시간에 들려지게 되고, 찔림이 되는 것일까?

 이 깨달음이 내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감당할 수 없는데...

 

 의문을 의문으로만 두면 우리에게 의심으로 끝나지만, 우리에게 하나님은 약속을 하셨고, 주셨다.

 성경 66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다.

 당대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신 약속이지만, 믿음으로 지금의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가운데서 부르심을 확인하자.

 그리고 지금, 임마누엘을 누리자. "내 말이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을 기억하자.

 

 그러면, 약속의 말씀 가운데 나타난 믿음의 선배들의 모습을 통해 지금의 나의 삶의 해석되어지고 보여질 것이라 믿는다. 인내의 시간, 고난의 시간, 축복의 시간, 나누어줄 시간, 누릴 시간, 감사의 시간.... 보여질 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