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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선반/출애굽기

출애굽기 3장(3:8-10) 1.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2)

모세를 부르신 내용으로 3가지를 생각해 본다.

 

 먼저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목적, 모세가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시는 것이 출애굽기 3장 8절 - 10절이다. 내용은 정리하면 간단하다.

 

 1) 히브리 사람들을 애굽사람의 손에서 빼낸다.

 2) 그들을 가나안 족속의 땅에 데려간다.

 3) 이 일에 모세 너를 사용하여, 너를 통해서 이루겠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1)번과 2)번의 내용은 창세기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지키시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이 믿을만한, 신실한 분이심을. 그 분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생각하자.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유능함을 가지고 사람을 선택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왜냐면, 하나님은 이미 전능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우리의 달란트(재능, 주어진 것)에 따라 나뉘어지거나, 달라지는 것으로 착각한다.

 예를 들면, 10대 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여 하나님께 삶을 드리겠다고 결심한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다른 이들보다 그림을 좀 더 잘 그리는 손재주가 있다. 그래서 스스로도 생각하고, 주변에서도 말한다. "그림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그래서 그림으로 대학을 준비한다.

 그런데, 떨어졌다. 마음을 잡고 재수한다. 또 떨어졌다. 힘을 다해 삼수를 하고 결과는 또 떨어졌다. 이럴 때 사람들은 생각한다. "나를 그림 쪽으로 부르신 것이 아닌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인간이 가진 재능의 어떠함을 따라 그를 부르시지 않으신다. 대학에 붙냐, 떨어지냐의 현상에도 구애되지 않으신다. 다윗이 돌팔매질을 잘했기 때문에 골리앗을 물리칠 자로 하나님이 부르신 것인가? 바울이 지식이 대단하고, 글에 능통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나? 전혀, 절대 아니다. 인간 능력의 어떠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다윗 아니어도 하나님은 골리앗을 죽일 사람을 택하여 골리앗을 죽일 수 있다. 바울이 아니어도 글 잘 쓰는 사람을 부를 수 있으며, 심지어 빼어난 글을 쓸 수 없다고 하여도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전할 수 있으시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기준은,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는 하나님의 뜻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하실 때, 하나님이 '굳.이.' 아브라함이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없다. 아니, 정확히는 우리는 모른다. 그에 대해서는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저 하나님의 무궁한 은혜와 선함에 따른 하나님의 뜻일 뿐이다.

 하지만, 그 이후는 아니다. 아브라함 이후는, 즉 하나님이 인간과 직접적인 언약을 채결하신 이후에는,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겪는 목적에 하나님의 약속이 전제가 되어 있다.

 선지자들도, 사도들도 모두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이삭, 야곱, 모셉,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등등에 이르기까지 좀 더 구체화되고 명확해지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약속 가운데,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모든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내가 납득할 때까지 파악할 수는 없다. 성경은 그렇게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을 하시고, 이루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가진 재능으로 비추어 볼 것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방향성을 깨달아야 한다. 그 안에 우리의 재능이 녹아들 수는 있겠지만, 우리의 재능이, 우리의 직업을 하나님의 사명, 하나님의 부르심 그 자체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떡볶이 집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겠는가? 떡볶이 집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겠는가? 떡볶이 집의 선한 영향력을 고민해보면, 맛으로 손님들의 발걸음을 유도하는 것, 친절한 미소와 적은 대화라도 말을 붙이는 것, 주변 상권들과 화합하는 것, 떡볶이를 어려운 이웃에게 간식으로 나눠주는 것 등등 자신의 재능을 살려서 할 수 있는 것이 많다. 그저, 떡볶이를 많이 팔아서 돈을 벌어 헌금하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 유치한 구분이고 초보적인 구분인가? 하지만 실제로 너무나 착각을 한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재능이나 직종에 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의 부르심이고, 그 가운데 순종하고자 한다면, 그 다음에 자신이 해야할 일, 할 수 있는 일이 보인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렇게 하셨다. 거대해 보이는 하나님의 계획인 출애굽에 정작 모세가 한 일,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앞에서 말을 전달하고, 지팡이를 사용한 것이 다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개인으로 끝나지 않는다.

 3)번은 성경의 대표성의 원리가 드러난다.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이 부름을 받는 장면들이 나온다. 대표적으로 이사야 6장. 웃시야 왕이 죽고, 이스라엘이 흔들리는 상황 가운데 성전에서 이사야가 스랍들과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저들에게 갈꼬" 여기서 말하는 저들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말한다.

 또 다른 장면이 있다. 사사기 6장에서 기드온을 부르시는 장면이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이 말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이스라엘 백성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는 뜻이다.

 

 무슨 말이냐. 하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개인을 부르시는 것으로 시작하시지만, 그 일의 결국은 공동체. 민족 공동체의 회복으로 연결이 된다. 즉, 대표자, 대리자를 부르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개인을 부르실 때, 민족 전체를 구원하겠다는 의지를 포함하여 알려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한 사람의 대표는 말 그대로 조직을 대표한다. 책임이 있는 자리다. 그에 따른 능력도 필요하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후, 그 상징으로 에덴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 에덴 전체를 다스리는 자로, 민족을 만들지 않으셨다. 아담 한 사람을 만드셨을 뿐이다.

 온 인류를 구원하는 구원자의 언약을 모든 민족 가운데 하시지 않으셨다.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 하셨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시는 것을 약속하셨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는데 하나님이 군대 조직이나, 정치 조직을 이용하지 않으셨다. 모세 한 사람을 통해서 일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나님은 대표성을 가진 이를 통해, 그 공동체 전체를 이야기 하셨다. 생각해보라. 범죄는 다윗이 했는데, 왜 나라 전체가 3일간 온역을 앓아야 했는가? 이는 다윗 한 사람의 잘못이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죄악과 다윗 개인의 죄악이 분리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즉, 하나님은 대표성을 가진 이와 공동체 전체를 같이 생각하신다.

 

 출애굽은 히브리 민족 전체의 구원의 역사다. 아니, 영적인 시선으로 보면, 그리스도인 전체의 구원의 역사다. 이런 일을 감당하는데, 하나님이 취하시는 방법은, 조직을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부르신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이루신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추론해 보자면, 하나님의 거룩성과 전능성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세상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힘이 필요하다. 명분이 필요하고, 사람들의 지지가 필요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출애굽이라는 어마어마한 새 시대를 여는 방법으로 한 사람만을 부르셨다. 만약, 이 한 사람을 통해 일이 이루어진다면, 사람들의 반응을 뻔할 것이다. "저 사람의 능력이 대단하다!!"

 그런데, 만약 그 사람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아니, 오히려 흠이 있고, 모자란 부분이 더 부각되는 사람이라면? 그렇다면 사람들은 의아해 할 것이다.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한가?"

 뒤에 10가지 재앙에서 나오지만, 하나님은 대답하신다. "그들로 하여금 내가 여호와 인줄 알게 하리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같은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니" - 출애굽기 8:10

 

 아브라함이 대단하거나, 모세가 대단하거나, 다윗, 엘리야, 이사야, 에스겔, 기드온, 바울, 베드로 등등이 대단한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그들을 존경해야 한다. 하지만, 그들 자체가 거룩한 것은 아니다. 모든 능력과 거룩은 하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대표성을 가진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함께 구원을 얻게 되었다.

 

 이 부분이 사람들 입장에서 억울하거나 부당하다고 느낄 수 있다. "나는 나이지, 내가 아닌 다른 존재인 대표가 나를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대표와 나를 분리하고 싶어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을 알면 이 대표성의 원리가 얼마나 은혜인지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거룩의 기준에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 그 잣대를 일일이 한 사람씩 통과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를 대표해서 한 사람만 통과하면, 우리 모두가 통과될 수 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보통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먼 옛날, 전쟁터에서 장수와 장수가 맞붙는 장면이 있다. 직접 전투를 하면 수많은 병사들이 죽으니, 장수전을 하는 것이다. 그 싸움에서 이긴 장수의 군대가 싸우지 않고 전체 승리를 가져가게 된다. 치열한 싸움 끝에 한쪽의 장수가 승리하였다. 내가 그 승리한 장수의 병사라면, 이것이 기쁨이지 않겠는가? "내가 전투 중에 공을 세우려 했는데 저 장수 때문에 공을 못세우게 되었다." 하는 마음을 가진 이가 있다면, 그 병사가 잘못된 것이지 않은가? 스스로의 공명심을 자신을 포함한 전우들의 목숨보다 중하게 여긴격이니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표하여 먼저 부활하셨다. 이를 믿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마다, 심판이 아닌 부활 후에 영원한 임마누엘을 누리게 되는 이 대표성의 원리가 부당한 것인가...?

 

우리 모두가 율법을 통과할 필요가 없다. 주님께서 율법을 통과하셨고, 이루셨다. 

 

 "모세의 입장에서는? 부당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시도하려 할 때는 안도와주고, 다 잃어버리고 나서 부르는 것도. 이제 조금 정착해서 작은 행복을 누리고 사는데 부당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저를 부르신 것이 대표성의 원리에 비추어 보면, 저를 희생해야 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반론에도 말씀은 말한다. 그 대표가 된 자들이 살아있는 동안 얻고, 누리고, 그리고 마지막에 죽고난 뒤에 얻게 될 영광과 은혜가 어떠한지.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 요한복음 17:1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 데살로니가전서 4:14

 

 

 

 누가 이런 대표가 될 수 있는가? 당연히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이들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구약과 신약을 보아 이렇게 정리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그리스도인 개인과 그들이 모인 공동체"

 

 구약은 '개인 -> 공동체'의 모습이었다면, 신약에서는 '공동체 -> 공동체'의 모습이다.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개인적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민족 공동체 전체를 위했다면, 신약에서는 12제자들부터 공동체로 부름을 받아, 교회라는 공동체가 대표성의 원리를 띄고 국가와 사회라는 공동체를 위하는 모습이다.

 때문에,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와 그들이 모인 공동체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가운데 부름을 받은 이들이다. 이 시대의 출애굽의 사명을 가진 이들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부르심을 분명하게 깯다고 확신하기 위해, 하나님의 약속이 기록된 말씀을 더 사모해야 함이 옳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조금씩 더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이 내게 부딪쳐오게 해야 함이 맞다.

 

 함께 발버둥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