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장의 후반부에는 크게 세 가지 이야기가 나온다.
1)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인 이야기
2) 모세가 십보라와 결혼하게 된 이야기
3) 히브리 사람들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된 이야기
사실 이 세 가지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 이야기다.
- 모세의 이야기
- 하나님의 이야기
왜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냐면, 모세의 이야기에는 당연하게도 모세만 나온다. 하지만, 히브리 사람들의 부르짖음에 대해 기록한 부분에는 하나님이 등장하신다. 이 차이다. 주인공, 주어가 모세가 되느냐, 하나님이 되느냐의 차이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성경을 자세하게 보면, 이 부분이 상당히 큰 차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출애굽기 2장 후반부의 짧은 열 다섯 구절 안에서도 이 차이가 나온다.
모세는 애굽에서 바로의 딸의 아들로 자라났다. 앞에 썼던 글에서처럼 이 일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당시 바로 공주의 정치적 힘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아버지 바로가 명한 명령인 "히브리 남자 아기들은 모두 죽이라."는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일이었다.
거기다가 우리들은 어떨런지 모르지만, 이집트 사람과 히브리 사람들은 겉모습의 생김새가 다르다. 당시 애굽의 공주가 결혼을 했었는지도 기록은 안 남아 있다. 무슨 말이냐? 모세가 히브리 사람이라는 것을 애굽의 왕실 내부에서도 모두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 공주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아닌, 외부에서 데려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유모를 히브리 여자를 데려다가 썼으니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이러한 모든 상황 가운데서 모세가 장성할 때까지 왕궁에서 자라났다.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어떤 교육을 받았으며, 어떤 정체성과 방향성을 가진 사람이 되었을까?
출애굽기 2장 후반부의 짧은 이 구절을 통해 많은 사람들은 모세가 어머니(유모인 요게벳. 친엄마)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나도 거기에 동의한다. 모세가 히브리 사람으로의 정체성과 민족주의적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면, 딱히 설명할 수가 없다. 좌우를 살펴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을 죽인 장면 다음에는, 다른 히브리 사람에게는 '동포'라는 말을 한다. 결정적으로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라는 표현도 나온다.
모세의 정체성과 성품의 방향이 애굽 사람이 아닌, 히브리 사람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모세는 결국 하나님과의 임마누엘이 없이 스스로의 힘과 지혜로 히브리 사람을 돕는 역할을 하려 했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애굽 사람을 쳐서 죽였다. 그리고 그 시체를 감추었다. 그런 다음 짐짓 모르는 척하다가, 자신의 동포가 "나도 죽이려 하느냐?" 하는 물음에 자신이 사람을 죽인 일이 탄로 난 것을 두려워하여 도망을 친다.
이 모습, 어디서 많이 본 장면같지 않은가?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아우 아벨을 죽인 다음에 하나님이 가인에게 찾아가 아벨이 어딨냐고 묻는다. 그러자 가인은 되려 화를 낸다. 마치 이 모습과 같다.
창세기 4장의 가인과 아벨 사건은 제물을 곡물로 드렸느냐, 양으로 드렸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로 곡물을 드리면 어떻고, 양을 드리면 어떤가?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냐고? 제사는 생명은 생명으로, 피는 피로 드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러한 율법은 출애굽기에서 등장한다. 창세기 4장에서는 율법이 아직 없었다. '하나님께 제사를 이렇게 드려야 한다.'는 구체적인 방법은 창세기 4장에서는 아직 등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율법에서도 스스로 가산이 부족하여 제물을 짐승으로 드리지 못할 것 같으면, 곡물로 드리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레 2:1, 5:11) 우리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고기 제물을 드렸냐, 곡식 제물을 드렸냐가 아니다.
창세기 4장의 가인과 아벨 사건의 중요 포인트 중 하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냐 아니냐"이다.
제사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창 4:4,5)로 나와 있다.
'아벨'과 '그의 제사'이다. '가인'과 '그의 제사'이다. 제사에 앞서 존재를 먼저 언급한다. 삶을 언급하는 것이다.
가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지향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그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없이, 나름 하나님의 일을 했는데,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 그래서 격하게 반응을 했다.
모세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모세가 하나님에 대해서 아예 몰랐을까? 아니다. 어머니 요게벳의 영향을 받았다면, 히브리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하나님에 대해 기억하며 살았다면, 몰랐을 리 없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임마누엘을 경험하지 못했다. 정확하게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 지례짐작하여, 스스로가 열심을 내어 살았다. 그런데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 가인과 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처럼, 모세와 모세가 나름 히브리 백성(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한 일을 하나님은 받지 않으셨다.
그래서 가인은 아우를 쳐 죽였고, 모세는 도망을 쳤다.
그리고, 모세는 십보라와 결혼을 한 후에 그의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지었다. 그 이름의 뜻은 '이방 땅의 나그네'이다. 무슨 말인가? 돌아갈 곳이 없다는 말이다.
가인에게 주어진 형벌을 기억하는가?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 창세기 4:12
하나님이 가인에게 준 벌은 나그네의 삶이다. 이것이 죄의 결과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임마누엘의 삶을 살지 않는 자들의 결과이다.
나그네는 돌아갈 곳이 없다. 그래서 나그네이다.
가인은 임마누엘의 삶을 살지 않았고, 자신의 방법으로 제사를 드렸다. 이것을 지적하는 일인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은 사건에 아우를 죽이는 일로 반응하였다. 그리고 나그네가 되었다.
모세는 임마누엘의 방법으로 삶을 산 것이 아닌, 자신의 능력으로 히브리 민족을 위한 일을 했다. 그런데 그 결과로 자신의 친 어머니와 형제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나그네가 되었다.
이 모습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2장의 앞 부분에서 언급했던 내용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1장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세상의 세력(애굽의 세력, 영적으로 사단의 세력)은 점점 더 그 강도를 강하게 더해간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가지고 살 수 있는가? 그 방법과 내용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며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임마누엘의 삶이다.
그런데, 2장의 뒷 부분에서 등장한 모세의 삶의 전반부는 임마누엘에 대한 우리의 오해가 드러난다.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하면 되겠지"
"하나님이 이 일을 기뻐하실거야."
"이건 하나님을 위한 일이지 나를 위한 일이 아니야."
아주 중요한 것이 있다. 이것을 하나님께 물은 적이 있는가? 이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때까지 기다린 적이 있는가?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야 할지 미련하고 멍청하게 구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그렇게까지 하나님께 물어보고, 기다리지 못한다. 그 순간에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이것은 기회야! 드디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어!"라고 생각하고 일을 저지른다. 그것이 내 모습이다.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결과는, 이방의 땅에서 나그네처럼 될 수밖에 없다. 나의 생각과 나의 기준으로 행한 일에 대하여 결과가 이러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물으며 행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볼 수가 없다.
그런데 후반부를 보라.
히브리 사람들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이 되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다고 나온다.
ㄱ) 하나님이 잊고 있다가 생각나신 것인가?
ㄴ) 부르짖어 기도만 하면 다인가?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겠다. 대답은 당연히 둘 다 '아니다.'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잊었다가 기억하신 것이 아니다. 마치 인간인 우리가 약속을 잊었다가 기억난 것 같이 느껴질지 모르나, 그것은 우리들 기준의 표현으로 하나님을 묘사한 것뿐이지,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다.
이에 대한 근거로는 창세기 15장에 이미 나와 있다. 아브라함과 출애굽에 대해 이미 다 이야기를 하셨다. 하나님은 잊으신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까지 히브리 사람들, 이스라엘 사람들이 힘들 때까지 내버려 두셨는가?
첫째로, 가나안 사람들의 죄가 아직 가득 차지 않았고
둘째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기도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심판을 하실 때, 직접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심판을 하실 때도 있으시나,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다. 그리고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심판하시지 않으실 때에는 주변의 환경을 통해서 일하신다.
그런데 이 방법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사용하신다.
예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이유를,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에 대한 심판을 바벨론이라고 하는 민족을 통해 이루신다. 이 이야기를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듣고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하나님? 하나님의 백성을 이방인의 손을 통해 혼내신다니요? 혼을 내셔도 하나님이 혼을 내주셔야죠." 하며 따진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을 통해서도 일할 수 있는 것이 나다." 하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천하의 모든 민족을 다스리는 하나님임을 알려주고 나타내신다. 그러자 하박국도 인정하고 깨닫는다.
마찬가지이다. 가나안이 범죄 한 일에 대하여 어떻게 심판을 하시겠는가? 이스라엘 민족이 그 땅을 차지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의 심판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에 가나안을 그냥 아브라함에게 주실 수 있음에도 그들의 죄가 '민족적 단위의 심판'으로 벌할 때까지 기다리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길 원하셨다.
생각해보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건 앞의 글에서처럼, 믿는 자들, 기도하는 자들이 아니고서는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을 믿는 시야. 하나님 중심 사상을 가지지 않으면 모든 것이 우연이고, 자연적 이치이거나 기적으로만 해석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들에게 보여지고 해석된다. 그래서 기도가 중요하다.
기도만 하면 다인가? 물론 아니다. 하지만, 기도하면 다 된다.
말장난이 아니다. 기도만 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맞는 것이지만, 기도를 해야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깨닫게 해 주신다. 그리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그 순간에는 몰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낄 수가 있다. 그래서 말한다. 기도만 한다고 다되는 것은 아니지만, 기도하면 다 된다.
모세는 주변을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움직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련하고 멍청하게 부르짖기만 했다.
모세의 모습은 기회로 보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미련하고 무식하게 보였다.
그런데 성경은 참 당황스럽다.
모세의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등장이 없다. 마치, "네가 계획하고 행동하였으니, 네가 끝까지 책임을 져볼 테냐." 하시는 것 같다. 그리고 미련하고 무식해 보이는 이스라엘의 모습에는 하나님이 등장하신다.
다시 말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주야장천 기도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가난을 벗어나고 싶다면, 하루에 10시간씩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건강한 몸으로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는 일들에 온 몸을 던져 일을 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이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무조건 잘했다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며 임마누엘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느냐? 아니면, 그저 주변 상황과 여건을 계산함으로 스스로 움직였느냐"를 말하는 것이다.
거친 세상의 세력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어떻게 행해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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