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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이야기 선반/출애굽기

출애굽기 3장(3:1-7) 1.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1)

 출애굽기 3장은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이다. 성경의 여러 네러티브 가운데 유명한 장면 중 하나이다. 주변에서 하나님을 위한 일을 한다는 사람들. 대체적으로 목회자의 길을 가거나 특별한 사명감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하려 할 때 고민을 하는 이들이라면 많이 읽고 묵상한 장면이다.

 이러한 해석과 묵상이 잘못된 것이냐? 결코 그렇지 않다. 목회자나 사명의식을 가지고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사람들이 처음에 느끼는 것은 부담감이다. 자신에게 능력이 있는지, 자격이 되는지의 여부를 자문하며 부담을 가지게 된다. 그런 이들에게 출애굽기 3장의 하나님의 부르심은 큰 위로와 도전, 그리고 사명감의 근원이 되는 장이다.

 

사명은 심부름 사(使) 목숨 명(命) 자를 쓴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심부름이다. 그래서 무겁고, 부담스러우며, 명예와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다.

 1절을 보면, 하나님의 산 호랩에 모세가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1절과 5절을 읽으면서 호랩산이 거룩한 곳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모세5경은 모세가 저작한 것이다. 그가 후세에게 남긴 것이다. 그와 이스라엘에게 호랩산이 거룩한 곳이기에 하나님의 산, 거룩한 땅 이라고 언급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땅 자체가 거룩성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호랩산이 하나님의 산이며, 거룩한 땅인가?

 답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로 임하셔서 모세와 만나주셨기 때문에 그곳이 거룩한 땅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기 때문에 그곳이 하나님의 산이다. 하나님이 없이는 호랩은 그냥 하나의 산이고, 떨기나무는 광야에 흔하고 쓸모가 없는 떨기나무일 뿐이다. 너무나 단순하지만, 성경을 읽으며 이것하나만 피부에 닿게 깨달아도, 하나님의 뜻을 기다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실 성경은 이 단순한 사실을 우리가 피부로 깨닫도록 종용하는 책이다.)

 

장소 자체가 거룩한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거룩한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고, 거룩한 곳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 거룩한 곳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 포로기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자다. 그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혼란 가운데 있는 중요한 질문 중 하나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데 왜 우리에게 이러한 고난이 발생하였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러한 의문을 가지는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당연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토라를 모세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

  2) 하나님의 임재를 기리는 성전이 예루살렘에 있었다.

  3)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한 언약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

 

 한 번 약속하면 반드시 이루시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한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함락이 된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방의 모든 신들은 헛된 우상이고, 가짜 신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신데. 그 분이 계신 성전. 그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이스라엘이 무너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현실은 무너졌고, 함락되었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 아니었던 것인가? 약속한 것을 져버리는 믿을 수 없는 분이셨던 것인가? 

 

 그에 대해 에스겔은 환상을 보았다. 하나님의 영광(임재)이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에서 성소로, 뜰로 옮겨가더니 마침내 성전 문을 나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다.(에스겔 10장) 즉, 하나님이 성전에 계셨음에도 예루살렘이 함락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기에 예루살렘이 함락된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성전만 있으면 하나님이 계시는 줄 알았다. 사람에게는 집이 필요하고, 집이 있으면 사람이 집으로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듯이, 하나님에게도 집(예루살렘 성전)이 있으니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엄청난 착각인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지 않을 수 있다.

 이 말의 뜻은 분명하다. 하나님을 우리가 임의로 묶어두거나, 길들이거나, 우리의 뜻대로 조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린 자녀에게 학원을 다니라고 등록시켰다. 하지만, 아이가 학원에 가지 않을 수도 있다. 친구와 놀고 싶어서라든지, 몸이 아파서 등등. 하다못해 어린 자녀도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선택을 하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얽매인다?

 물론 한가지 가능한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구속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이름을 건 약속은 반드시 지키신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함께 하겠다고 다윗과도 약속하신 하나님이시지 않은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다윗에게 조건을 거셨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이것을 어길 경우예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신다는 것. 이스라엘은 이 조건에 합하지 못했고, 그래서 하나님은 성전을 떠나셨고, 예루살렘은 함락되었다.

 

신전이라는 울타리 안에 신을 모시고(가두고), 거기서 나오지는 말라고. 필요하면 우리가 신전을(울타리를) 찾아갈테니... 하는 식의 이방인들과 같은 생각으로 하나님을 여기는 것.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더라도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다시 출애굽기 3장이다.

 호랩산 자체가 하나님의 산인가? 거룩한 땅인가? 아니다. 임마누엘일 때에만 하나님의 산이요, 거룩한 땅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교회를 다니기 때문이 아니라 임마누엘 때문이다. 내가 지금 임마누엘을 경험하지 못하고, 누리고 있지 못하다면.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직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례식 때 신앙고백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신다고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착각일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쓸데 없다는 말이 아니다. 형식과 격식이 필요없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구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함으로 인한 임마누엘이지, 형식과 직분 그 자체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거나 형식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호랩산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불타는 떨기나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불길 자체가 중요하다. 이것이 분명하다면, 호랩산이 아니어도 거룩한 산, 거룩한 땅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우리가 아버지께 예배할 수 있게"(요한복음 4:21) 된다.

 

우리가 대단해서, 자격이 있어서, 거룩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약하다. 우리는 악하다. 주님이 필요하다.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을 위한 형식과 직분이다. 잊지말자.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처음으로 자신을 소개한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 출애굽기 3:6

 

 우리는 이 소개 문구에서 2가지를 알아야 한다.

  1)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하나님

  2)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어떤 일을 하신 하나님

 

 1)번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낸다면, 2)번은 하나님의 전능성과 우리를 향한 사랑을 나타내신다.

 우리가 누군가를 믿을만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어떤 약속을 지켰는가, 그리고 그 횟수가 얼마나 많은가를 통해 믿을만하다고 평가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을 하셨다. 땅을 차지하게 한다. 후손을 주겠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약속을 이어가게 하시려는 것이다. 때문에 8절에 나타낸 내용은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한 약속임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모세와 이스라엘을 약속을 했으니 지키기는 하겠지만, 귀찮다.... 하고 아무 가치 없는 존재처럼 여기시는가? 아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아브라함의 어떠함을 보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아내를 애굽왕에게 팔았어도, 이스마엘을 낳았어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다시금 찾아오셨다. 이삭이 아버지와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어도 이삭에게 100배의 축복을 주셨다. 야곱이 부모와 형제를 속이고 자식들을 편애하는 모습을 보여도 야곱에게 복을 주셨다.

 하나님은 약속을 어거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약속한 이들을 사랑하셔서 약속을 하셨고, 그 약속의 대상을 진심으로 사랑하셨다. 때문에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실 때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 출애굽기 3: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연약함과 괴로움을 보고, 듣고, 알고 계신다. 모르지 않으시다. 하나님은 우리와 임마누엘을 원하시고, 때문에 우리의 고통 가운데 함께 계신다. 심지어, 그 분은 거룩한 전능자이시기에 우리 같은 능력의 한계를 가진 죄인이 겪는 고통따위 겪지 않으셔도 되고, 않으실 수도 있었지만 그 고통을 경험하셨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 히브리서 4:15

 

 하나님은 우리를 진실로 사랑하셔서, 임마누엘을 원하시고, 우리의 연약함도 체험하셨다. 우리를 누구보다 이해하고 공감해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 분이 10절에서 말씀하신다.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약속을 지키시겠다고 하신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의 임마누엘이다.